2015년, ‘킬미 힐미’는 많은 시청자의 마음을 사로잡았습니다. 단순한 로맨스 드라마가 아닌, 다중인격장애(DID)를 다룬 이 작품은 자극적인 소재를 넘어서 인간의 내면 깊숙한 상처와 치유, 연대의 가능성까지 따뜻하게 조명한 드라마였습니다. 지금도 회자되는 이유는 오롯이 그 감정의 결 때문입니다. 이 글에서는 ‘킬미 힐미’ 속 다중인격 묘사의 섬세함과 명장면들, 그리고 그 안에 담긴 진심 어린 메시지에 대해 천천히 들여다보려 합니다.
섬세하게 그려진 일곱 명의 인격
주인공 차도현에게는 무려 일곱 개의 인격이 존재합니다. 그 각각의 인격은 단순한 설정이 아니라, 차도현이라는 인간이 어린 시절의 고통과 외면 속에서 만들어낸 ‘자기 보호 기제’입니다. 그 인격들은 상처받지 않기 위한 본능에서 태어난 존재들이며, 그만큼 모두가 다르게 아프고, 다르게 사랑받기를 원합니다.
신세기라는 이름의 인격은 화려하고 당당한 성격을 가졌습니다. 폭력적인 상황에서도 유쾌하고 능청스럽게 상황을 전환시키며, 차도현이 감히 하지 못하는 행동을 대신해 줍니다. 반면 페리박은 자유와 평화를 상징하며, 억눌린 감정이 유머로 발현된 존재입니다. 또 나나라는 인격은 어린 시절 상처의 상징 그 자체입니다. 단지 귀엽거나 신기한 설정이 아닌, 각 인격은 모두 깊은 내면의 고통을 상징하며 존재합니다.
이 인격들이 차례로 등장할 때, 배우 지성은 그 인격 하나하나에 맞는 말투, 눈빛, 숨소리까지 바꾸며 시청자의 몰입을 도왔습니다. 그 연기가 빛났던 이유는 단순한 ‘변신’이 아닌, 인격마다의 슬픔과 외침을 이해하고 표현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우리는 그 다중의 모습 속에서 한 사람의 아픔을 더 깊게 들여다보게 되었죠. 드라마는 인격이 바뀌는 순간의 ‘연기력’보다, 그 인격들이 존재하게 된 이유에 집중합니다. 그래서 더욱 진정성 있게 다가옵니다.
마음을 건드리는 명장면들
‘킬미 힐미’의 명장면은 화려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가장 조용하고, 가장 슬픈 순간들이 시청자의 마음을 울립니다. 그 중 하나는 어린 시절 회상 장면입니다. 차도현이 트라우마를 겪던 그 집, 어둡고 무서운 공간 속에서 아이는 그저 엄마의 품을 원했습니다. 그러나 그 품은 닫혀 있었고, 결국 그는 스스로를 지켜야만 했습니다. 그때 생긴 것이 바로 ‘신세기’라는 인격입니다.
또 다른 명장면은 오리진과의 감정 교류입니다. 처음엔 장난기 가득한 의사와 환자의 관계였지만, 시간이 흐를수록 서로의 상처에 진심으로 다가가는 모습은 많은 이들의 눈시울을 붉혔습니다. 특히 신세기의 고백 장면에서 “그 사람은 나를 낳고, 나는 그 사람을 보호했어”라고 말하던 순간, 시청자들은 ‘한 사람 안의 여러 감정’이 어떤 식으로 작용하는지를 체감할 수 있었습니다.
그리고 마지막 회, 인격들이 하나씩 작별 인사를 나누는 장면. 그것은 단순한 해피엔딩이 아니라, 내면의 상처가 조금씩 치유되며 ‘하나의 나’로 되돌아가는 긴 여정을 의미합니다. 그 장면은 눈물 없이 보기 힘들 만큼 아프고, 또 따뜻했습니다. 사람의 마음이란 이렇게도 복잡하고도 정직한 것이구나,라는 생각이 들게 하는 순간이었죠.
정신질환을 바라보는 따뜻한 시선
‘킬미 힐미’가 특별했던 또 하나의 이유는, 정신질환을 자극적이지 않게, 오히려 깊은 존중과 이해의 시선으로 그려냈다는 점입니다. 다중인격은 드라마 속 흥미로운 소재일 수도 있지만, 현실에서는 누군가의 피할 수 없는 삶입니다. 이 드라마는 그 삶을 드러내는 방식에서 매우 섬세했습니다.
차도현의 병은 갑작스럽게 생긴 것이 아니라, 오랜 시간 동안 쌓인 고통과 외면의 결과였습니다. 그를 단지 ‘환자’가 아닌, ‘한 인간’으로 바라본 시선 덕분에 시청자는 그의 고통에 자연스럽게 공감할 수 있었죠. 또한, 그를 돕는 인물들 역시 그를 불쌍하게 여기지 않고, 있는 그대로의 존재로 인정합니다.
특히 오리진은 차도현을 ‘치료해야 할 대상’이 아닌, ‘함께 살아갈 사람’으로 바라봅니다. 이 시선이 바로 드라마가 전하고자 했던 메시지의 핵심입니다. 우리 안의 상처를 마주보는 일은 두렵고 어렵지만, 누군가 그 옆에 함께 있어준다면 우리는 조금씩 나아갈 수 있습니다.
킬미 힐미는 그 사실을 감성적으로, 그러나 절대 가볍지 않게 전달합니다. 그래서 이 드라마는 오래 기억되고, 다시 떠올릴수록 마음을 따뜻하게 만드는 이야기로 남아 있습니다.
‘킬미 힐미’는 단순히 흥미로운 인격 전환극이 아닙니다. 인간의 상처, 치유, 그리고 서로에 대한 연민과 이해를 담은 섬세한 이야기입니다. 일곱 명의 인격이 아닌, 일곱 겹의 감정을 품은 한 사람의 삶을 보여주며, 우리 모두의 내면에도 그와 비슷한 무언가가 존재한다는 사실을 조용히 건넵니다. 지금 다시 본다면, 우리는 과거보다 조금 더 따뜻한 마음으로 이 드라마를 바라볼 수 있을지도 모릅니다.